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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의 소리-(서양화가)

김 미 령자연의 소리

 

“인간은 땅을 본받고 땅은 하늘을 본받고, 하늘은 도를 본받고, 도는 자연을 본받는다.”

 

노자의 <도덕경> 25장의 글처럼 세상의 근본 이치는 자연의 순리에 맞춰서 살아가는 것이라 깨닫게 된다.

자연을 바라보면서 자연치유가 되듯이, 자연을 그리며 그들의 내면의 세계를 들여다보게 된다,

자신 또한 치유가 됨을 깨달으며, 진정으로 자유와 기쁨과 행복을 느끼며, 사람들이 나를 알아주지 않아도

기쁘게 작업하는 법을 터득하었다.

 

옛 사람들은 자연과 호흡하며 자신을 깨닫고, 인간의 길을 치열하게 물었다.

그런데 현대인은 많은 스케줄에 매여 고달프고 여유없이 앞만보고 달려가는 형국이다. 땅을 밟으며 길을 가다가,

길가에 피어있는 들꽃을 바라보며 피어오르는 감동에 발걸음을 멈추는 감수성을 기를 사이도 없이, 삶의 향기와

미덕 대신 돈과 물질속에 자신을 잃어가는 모습을 씁쓸하게 확인한다. 우리나라에는 훌륭한 장인정신이 있다.

기교에 의존하지 않고 혼신의 노력으로 생명을 잉태하고 출산하는 마음으로 작품을 탄생시킨다. 누군가는 많은

시간을 연마하여 빛을 발하는 감동을 주고 은근과 끈기의 우리의 얼을 이어가야 할 것은 분명한 것이다.

 

무의식에 눈과 귀를 열어 사물을 보고 관찰하고 대화하는 동안 내가 가슴뛰는 대상과 만나게 된다. 황토빛과 갈색을

보노라면 내 심장의 고동이 세차게 움직임을 느끼며, 흙에서 와서 흙으로 돌아가는 내 본연의 모습을 사랑하는가 하고

느꼈다. 요동치는 심장소리에 정신을 집중하여 사모하는 것이 무엇인지 골똘히 들여다보니, 나를 그토록 설레이게 했던

것이 흙이려니 했건만, 사람들 발부리에 차이는 돌이라는 걸 새삼 다시 깨달은 건 얼마 안된다. 나무도 꽃도, 풀도 모두

결국엔 흙으로 돌아가며, 또한 수 만년 시간속에 그들은 발부리에 차이는 돌과 바위가 되는 것을... 그래서 그토록

갈구해 오던 것은 바로 다듬어지지 않고 그냥 그대로의 흙과 돌과 바위였음을 알았다.

 

그리고 또 하나 그것은 바람이다. 바람과 함께 만나서 모든 것이 이루어진다는 것을 깨닫고서는 자연의 경이로움에

머리를 숙인다. 흘러가는 시간이 곧 바람이고, 흙과 돌과 바위는 본연의 모습이다. 내가 알아가는 모든 것을

형상(形象)으로 풀어 가야 하는 것이 또한 나의 숙제다. 유년시절 내게 다가와 도란도란 대화해 주던 모든 사물들은

피상적 만남이었다. 시간의 바람속에 순환하는 모습을 바라보며 깊어지는 그들의 내면의 모습과 대화하는 시간을

보내곤 하였다.

 

바라보는 대상에서, 바람이 서로 하나가 되게 하고, 느끼며 알게 하고, 뼈속까지 하나될 때 비로소 다 안다고

하여야 할 것이다.그러니 지금도 다 안다고는 할 수 없을 것이다. 그저 알아가는 과정일 뿐이다. 알아가는 과정

또한 삶이다. 다만 먼저거쳐간 바람과 흙과 돌, 바위들이 일러준 것들에서 추측할 뿐이다. 그 것을 내가 표현

할 수 있는 방법을 동원하여 무수히 고민하고 실험하는 단계에 나는 서 있다. 장인정신을 가슴에 담고 은근과

끈기로 물감 위에 물감을 덧대면서 여린 풀잎으로도, 두터운 껍질로도, 바람과 맞서는 강한 바위로도 잉태시킨다.

그것들이 마지막엔 흙과 돌로 모두 하나됨을 알아가는 과정이 될 것이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이 바람과 함께 하는

것이라는 것 또한 알고 있다.-자연의 마음과 언어를 이해하며,

 

"자신안의 무의식의 세계를 정리해 보니 인간의 본성은 자연의 이치와 같고, 자신을 깨달은 사람은 만물에게

자신을 맡긴다."

는것을 깨달으며 내가 그리는 자연은  자서전이다. 길을 걸을 때도, 자연과 벗삼아 일을 할때도, 무수히 말을 걸어오는 

자연과 함께 소통하며, 나를 정리해오는 과정이었다. 작품들은 자연이 나에게 들려주는 소리에 집중하여 나누는

자연과의 대화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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